이해하기 위한 거리
by 유선
<Home, Bittersweet Home>에 대해 말하기는 쉽지 않다. 작가 양승욱이 자신과 평생을 함께 살던 조부모님이 치매를 앓다 임종에 이르기까지를 기록한 이 사진들 앞에서는, 언어가 멈춰진다. 어떻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감각. 사진을 본 관객들이 종종 ‘나에게도 언젠가 일어날 일’, ‘아마 우리의 노년과 죽음도 이것과 똑같을 것이다’ 라는 소감을 이야기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작가에게 일어난 사건에 대한 공감이지 그의 작품에 관한 것이 전혀 아니다. 이 시리즈 앞에서 말이 멈춰지는 까닭은, 사진 속 피사체를 관객이 쉽게 판단하거나 해석할 수 없게끔 만드는 작가의 시선과 연관되어 있다. 그것은 작가 스스로가 이 작업을 통해 만들어 낸 어떤 거리일 것이다. 사진가와 피사체 사이의 거리, 일어났고 일어나고 있으며 반드시 일어날 사건에 대한 거리, 불가능성을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에 대한 성찰이 여기에 있다.
이 시리즈는 작가의 다른 작품들과 아주 다른 위치에 있다. 수천 수만 개의 작은 인형이 빽빽하게 도열해 공간을 메우고 있는 <Fast Toys>나, 인형의 얼굴을 클로즈업 한 <Keep Calm and Play with Toys>, 히어로 캐릭터 인형들의 게이 러브신을 연출한 <Play Toy>, 버려지고 주목받지 않은 풍경을 담은 <Night in Soje>와 <#Gunsan> 등의 시리즈에서 작가는 대리 표상이라 할 수 있을 만한 사물이나 풍경을 등장시켜 왔다. 그것은 평론가 남웅의 표현처럼 “실패한 기억 위를 미끄러지는” 기록의 작업인 것처럼 보인다. 작가는 피사체에 플래쉬를 터트리고 프레임의 정 가운데서 관객을 응시하게 한다. 주로 눈이 있는 것들, 무언가를 닮았기 때문에 묘하게 익숙하고 낯선 이 사물들에게는 운하임리히(unheimlich)라는 표현에 들어맞는다. 결코 집처럼 편안하거나 익숙하지 않은, 그렇지만 왠지 익숙한 각자의 집과 같은 것을 떠올리게 하는, 그래서 기괴할 정도로 낯선 감정들을 불러일으키는 것들. 양승욱은 동시대에 존재하는 어떤 세계를 포착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가공의 플라스틱 월드 같은 느낌을 준다. 그가 납작하고 번쩍거리며 공장에서 갓 나온 가짜인 것 같은 풍경이나 사물을 보여줄 때에, 그것이 대부분의 관객들에게 낯설고도 익숙한 무언가를 떠올리게 하는 것들이라는 점에서 어떤 감응을 불러일으킨다. 이 사물들은 언젠가 어디선가 마주쳤던 것 같은 무엇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이것은 작품에서는 드러나지 않지만 이면에 이미 ‘있었던 것’, 원본, 혹은 과거에 일어났던 사건을 전제로 했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Home, Bittersweet Home>의 이미지들은 너무도 다르다. 작가는 사물들에게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피사체에 플래쉬를 터트리고 프레임의 정 가운데에 있게 하지만, 그것은 플라스틱 월드로 표상될 수 없는 실재다. 작가가 마주하고 있는 것은 대리 표상이나 ‘닮은 것들’이 아니라, 원본이자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사건이다. 일어났으며, 일어나고 있고, 다시 일어날 일. 개입해 바꾸는 것이 불가능한 결말을 향해 서서히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작가는 카메라를 든다. 그것은 기록을 위한 것이 아니지만, 딱히 기록이 아닐 이유도 없다.
작가가 카메라 뒤에서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는지는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냉정하게, 혹은 눈물을 꾹 참고, 라는 수식어는 어울리지 않는다. 카메라가 포착하는 이미지들은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다. 이 이미지들은 덤덤하게, 함께 공통의 사건을 겪어낸 가족이 구성원의 일부가 늙고 아파지고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시간들을 ‘다시’ 함께 보내고 있다는 것의 충실한 기록처럼 보인다. 애써 위악적으로 보이려 하지 않고, 감상적으로 느껴지게 만들지도 않는다. 그러나 완벽하리만큼 선명한 이미지면서, 왠지 모르게 흐릿하고 모호하게 느껴진다. 작가는 이 이미지들을 아주 가깝고도 아주 멀리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플래쉬와 구도로 피사체를 강조하고 있는 동시에 비네트 효과로 화면의 가장자리를 어둡게 함으로써 이미지를 현재 시점이 아닌 과거의 회상이나 꿈 속의 것인 것처럼 느껴지게 한다. 나란히 놓인 두 장의 사진들은 단지 형태의 유사성이나 시간의 인과로 묶여져 있을 뿐, 쉬운 의미화와 계열화를 방해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염을 한 할머니의 모습과 빨랫줄에 널린 인형 쿠션 커버를 병치한 페이지나, 순한 강아지 인형의 얼굴과 그것을 닮은 할머니의 얼굴, 휠체어를 탄 할머니와 비슷한 모습을 한 이름 모를 기계 등 쌍으로 묶인 이미지들이 그렇다. 이 앞에서 우리는 어떤 해석이 가능할지,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할지 모르게 된다. 작가가 이 피사체와, 이 사건과 가지는 거리를 관객이 쉽게 파악하기는 어렵다. 이것은 아마도 그가 스스로 해석하거나, 대상화해서 설명하기가 불가능한 사건과 맞닥뜨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해석하고 연출하는 방식으로만 작품을 만들어 온 작가는 그러한 의도와 욕망이 불가능해지는 지점에서 다시 카메라를 든다.
수전 손택이 말했듯이, 카메라를 들어 사진을 찍는다는 행위는 관광객들이 스스로 기념사진을 남기는 것처럼 사건에 깊게 개입해 그것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이기도 하고, 동시에 전쟁의 참상을 찍는 사진가들처럼 사건과 완벽하게 먼 거리를 두는 것이기도 하다. 일어나고 있는 사건에 참여하고 있는/참여할 수밖에 없는 가족의 구성원으로서 작가는 이 순간과 멀어지기 위해, 그리고 동시에 이 순간의 가장 가까이에 있기 위해 카메라를 드는 것처럼 보인다. 그 자리에서 함께 이 모든 일들을 겪고 있는 것을 증언하는 동시에, 그 모든 순간에서 거리를 두고 너무 멀지 않게, 그러나 너무 가깝지 않게 사건을 대하는 태도. 이 오랜 작업을 통해 작가가 성취하고 있는 것은 스스로 만들어낸 이 거리가 아닐까.
나와 당신의 삶 속에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으며, 그 일은 언젠가 과거에 일어났던 것과 같고, 미래에도 같은 모습으로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 오래된 질문 앞에서 작가는 수천 수만 번의 셔터를 누른다. 이것은 모두에게 닥칠, 막는 것이 불가능한 사건인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을 대하는 작가의 태도는 전혀 니힐리즘적이지 않다. 본인의 노년과 죽음도 비슷한 모습일 것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미래는 아직 알 수 없다”고 답한다. 이것은 이미 일어났던 일이고, 일어나고 있으며, 반드시 다시 일어날 일이겠지만, 우리는 아직 아무것도 단정할 수 없다고 말이다. 이 작업을 통해 작가가 만들어낸 것은 사건의 반복을 온 몸으로 마주하며 찢어서 연, 일말의 가능성이 존재하는 세계다. 작가는 이 장면들 앞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래를 알 수 없는 것으로, 미결정의 세계로 열어둔다. 어떻게 그렇게 말하는 것이 가능한가? 가능하다. 그것은 작가가 사진 찍기를 통해 불가능한 상황과 자신의 거리를 가늠하고 발견해왔기 때문에. 자신에게 닥친 사건을 이해하고 견디고 사랑할 수 있게 되기까지의 거리, 일어났던 일과 일어날 일을 받아들이기 위해 필요한 그 만큼의 거리를 스스로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차라투스트라는 그의 ‘기호’를 때로는 너무 가까운 곳에서, 때로는 너무 먼 곳에서 수신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적당한 거리를 예감한다. 영원회귀 안에서 그를 병들게 만드는 것은 이 거리를 통해 해방과 구원의 반복으로 바뀌게 된다.”(질 들뢰즈, 『차이와 반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