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랑극단 (Traveling Troupe)
기간 : 2022. 10. 26. – 2022. 12. 3.
장소 : 유아트스페이스 (Uart space) 서울 강남구 청담동 101-6 2F
호더(hoarder)의 장소와 퀴어, 민중
-남웅
양승욱의 사진에 한가득 등장하는 장난감 인형들은 하나하나 사연 있어 보이지만 정작 개별 서사와 출처는 알 수 없다. 추측건대 손때 묻은 이들은 평상시에도 컬렉션으로 살뜰하게 모셔지기보다 더미로 방치되거나 모퉁이에 쌓여 왔을 것이다.
인형들은 줄곧 게이 DVD방과 공중화장실, 도시 공터를 채웠다. 쇼윈도와 진열대에 놓인 것과는 다른 분위기를 풍기던 이들은 서로 몸이 포개어져 성적 체위를 흉내 내거나 성별이 바뀐 모습으로 담겼다. 어두운 공간을 플래시로 포착하거나 낡은 표면을 고스란히 노출한 연출은 주류보다 비주류를, 공공장소보다 후미진 자리를, 개별성보다 익명의 군상을, 낮보다 밤의 시간을, 양보다 음의 내밀한 쾌락을 표명해왔다. 특정 장소를 인형으로 가득 채워 더미 창고로, 이른바 호더의 장소로 재구성하는 연출은 이상한 여운을 환기하는데, 텅 빈 표정의 인형들로 비어 있는 공간을 채우는 이중의 공백이 작동한 까닭은 아닌가 생각한다.
그간 작가가 장소특정성을 배경 삼았다면 이번 개인전 《유랑극단》에는 게토의 장소성을 벗겨내고 대중적 의식(儀式)을 무대화한다. 작가는 스튜디오로 들어와 패브릭을 배경에 두고 인형의 대열과 배치를 정돈한다. 군집의 행위성을 부각하여 구성하는 현장의 형식들은 행진과 집회, 장례와 콘서트 등 공공이벤트의 모습을 취한다.
화면은 은연중에 패턴과 색의 조합으로 포착된다. 일테면 안드레아 구르스키(Andreas Gursky)의 작업을 연상시키는 몇몇 사진은 공간을 평면적으로 담아 추상적인 패턴을 강조한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는 집단의 공적 행위를 부각하거나 점거의 내용 자체를 전면화하여 문화적 행위의 양식을 재연하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의 면면은 양승욱의 사진을 다분히 설명적이라는 비판에 연루시켜왔다. 말인즉 인형은 특성상 연출된 상황의 무게를 가볍게 만드는 재현적 소재로, 전체를 구성하는 익명의 부분으로 동원된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연장선상에서 이번 전시는 이렇게도 평할 수 있다. 그의 신작은 이전의 작업방식을 반복하며 과거 장소특정적 작업에서 ‘의식특정적’ 작업으로 이동한 것은 아닌가. 이는 그의 작업을 ‘퀴어 민중미술’이라는 설익은 인상비평으로 박제하고 방치하는 해석적 난관을 초래한다.
하지만 그의 작업뿐 아니라 이를 향한 해석과 비판은 정작 가까이 있는 인형을 누락하곤 한다. 인형들은 특정 장소와 대중 이벤트를 전유하고 재현하며 그것이 놓인 상황의 무게를 가볍게 만드는 기능을 수행한다. 그 과정에 작가는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통념적인 의미를 반복하는데, 결국 인형은 전면에 동원되면서도 무대 위에 무언가를 설명하는 더미에 그치며 프레임에 포착되는 동시에 소외되는 것이다.
특정 상황에 동원되는 텅 빈 명랑함과 낡은 웃음들은 구제될 수 있을까. 물론 인형 더미로부터 구제할 실존과 역사성은 부재하거나 희박할 것이다. 하지만 부재와 희박함의 위상을 호더의 결핍에 포개어 독해를 시도할 수는 없을까. 가령 그가 수집하고 사용하는 인형들은 특정 캐릭터를 저급하게 재현한 표상이자 물성을 갖는데, 이는 호더가 취급하는 인형의 부산물로서 위상을 강력하게 환기한다. 도구로서 인형 자체에 집중하고 사진을 경유하여 빈곤한 물성이 걸쳐 있는 맥락의 층들을 조명하면 어떤 조형성을 펼쳐낼 수 있을까. 인형의 얄팍한 존재적 무게는 ‘익명의 군중’이라는 비유를, 결핍의 구멍을 끝내 봉합하지 못하는 호더의 내적 공백을, 그럼에도 구멍을 끝없이 채우기 위해 소모해온 무용한 대체물들을, 외려 그것만이 결핍을 설명할 유일한 표상일 수밖에 없음을 남기고 있지는 않은가.
알록달록 색을 발하는 인형들이 실은 오랜 시간 방치된 것임을 증언하고 열화 복제된 빈곤한 웃음 다발에 지나지 않음을 작가는 무대의 방식으로 사려 깊게 모아내 왔다. 그것이 봉합할 수 없는 우울과 외로움의 심연에 끝없이 화면을 채우며 당신에게 신호를 보내왔다고 읽는 것이 허용된다면, 작가는 장소에 모여든 군중의 표상 이면에 집단적 정동을 사진술로 열어낼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양승욱의 작업을 접해온 많은 이들이 그의 작업을 기억할 때 특정 장소에 천착하고 현장을 설명하듯 재연해온 면모에 익숙해져 다른 독해 가능성을 방치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혐의를 품으며 글을 쓴다. 일련의 독해는 무용한 더미들을 그저 무용하게 남겨버린 데 대한 책임을 누구보다 작가에게 요구한다. 설령 책임의 실체 또한 무용하고 무의미한 것일지라도 말이다. 삐딱하고 답 없는 질문에 그가 사진으로 답할 수 있다면, 적어도 사진의 물성으로 판에 박힌 인형을 다시금 구제할 수 있거나 적어도 구제할 수 없음을 증언한다면 그가 계속해서 담았던 인형의 조형적 양식에는 갱신이 필요할지 모른다. 누군가의 공백을, 공백의 장소를, 그리고 당신의 외로움과 결핍을 채우는 데 수없이 동원하고 실패함에도 실존의 구멍을 증명하는 텅 빈 얼굴들은, 그것이 단지 당신만의 구멍이 아니었음을 환기한다. 개별의 서사도 맥락도 알기 어려운 저열한 익명의 레디메이드 이미지를 그의 사진은 끝내 설명해야 한다. 인형의 빈곤함을 담는 사진이라는 빈곤한 매개의 지층 또한 그는 파고들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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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을 쓰기로 했지만 변론도 설명도 아닌 채 던져놓은 이 글은 당장 손에 잡지 못하고 어쩌면 영영 나오지 않을지 모를 형상의 가능성을 호출한다. 하지만 시점도 관점도 모호한 글의 개연성을 좀 더 다른 맥락으로 뻗어 설명할 수 있다면, 그의 사진은 그저 그가 천착해온 게토의 풍경과 소재로서 인형을, 인형들이 애써 설명하는 특정 상황들을 둘러싼 비평적 형상만을 가리키지는 않을 것이다. 단언컨대 그가 호더의 태도로 펼쳐내는 사진술은 대중과 공동체의 일원들이, 또는 성원의 몫을 갖지 못한 이들이 어떻게 제 실존의 공백으로부터, 또는 공백으로 남아야 한다는 강요 속에 목소리를 부여하지 않는 환경으로부터 죽음까지도 박탈하는 삶을 증언할 수 있는 양식을 입체적으로 가설하고 제 삶의 궤적을 구성해나갈 것인가의 문제에- 그러니까 비난과 멸시에도 게이 찜방을 찾아 이름 없는 이들을 하염없이 맞기 위해 어둠을 헤치며 몸의 모든 구멍을 벌렸을 누군가의 하염없는 욕망과 텅 빈 시선을, 수다한 감각적 요소들로 SNS에 끼를 펼치며 제 모습을 끝없이 전시하고 관심을 희구하는 이들의 명랑하고 가난한 과시를, 1년 중 며칠 광장에 나와 무지개를 온몸에 휘감으며 ‘자긍심’이라는 빈곤한 실존을 외치는 강렬함을, 출근길을 가로막으며 상스러운 비난을 몸으로 받아내면서도 함께 살아가자고 외치는 손상된 이의 호소를, 안전에 대한 보장은커녕 인건비를 줄이려고 일하는 이들을 위험에 노출 시키는 회사에서 불안정 노동자로 일하다가 기계에 몸이 끼어 사망한 이가 챙길 겨를도 없었을 마지막 숨결을, 바로 옆에 동료가 죽어나가도 현장을 가린 채 어제와 같은 일을 하라고 지시받는 이들이 금지당한 감정들을, 구조를 요청해도 직장에서 스토킹 남성에게 죽임을 당해야 했던 여성 노동자의 절박함을, ‘존엄’이라는 빈곤한 단어를 어떻게든 지켜내기 위해 길바닥으로 공중으로 제 몸을 드러내고 위험을 자처하는 이들에 – 결부된다. 이들이 어떤 모습으로든 연결이 가능할 때, 그제야 우리는 ‘퀴어 민중미술’의, 또는 ‘민중미술의 퀴어적 돌파’라는 운을 띄울 실낱의 희망을 품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