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40
살친구 양승욱, 허호 작가님께,
구어체가 때때로 말을 덜 에둘러 할 수 있다는 데에 공감하신다면, 이 편지가 서문을 대신하게 되는 점을 양해해주셨으면 합니다. 서문은 보통 전시의 이해를 돕기 위한 길잡이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이번 전시에서 저는 문어체로 된 서문을 쓰는 일에 두 가지 어려움을 느꼈습니다. 첫 번째는 전시 전경과 전시 제목만으로도 기본적인 메시지가 충분히 전달되기에 서문을 따로 쓰는 쓸모에 대해 따지게 되는 어려움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살친구라는 ‘콜렉티브’와 살친구의 ‘이번 전시’를 이어서 설명하는 데에 느끼는 어려움이었습니다. 글을 쓰는 과정에서 해석을 내리기에 앞서 질문이 꼬리를 물기에, 이렇게 네 글자의 제목보다 긴 질문을 담은 편지를 씁니다.
이 전시의 주제의식은 도색적인 사진과 드로잉으로 채워진 벽면과 두 작가의 연령을 가리키는 제목 《3040》만으로도 충분히 설명됩니다. 그것은 게이 커뮤니티 안에서의 섹슈얼리티와 나이듦에 대한 정동이 되겠네요. 섹슈얼리티를 신체를 둘러싼 욕망이라고 생각할 때, 보통의 경우 나이듦은 어느 시점에서 이 욕망을 배신하는 방향으로 이동합니다. 특히 욕망받는 신체를 배신하는 방향으로 말이지요. 누구나 아쉬워 합니다. 하지만 그 정도는 섹슈얼리티를 자신의 첫 번째 정체성으로 삼을 때 전혀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사실 이성애자라면 자신의 성적지향이 ‘정상’으로 받아들여지기에 이를 순서까지 매겨가며 정체성으로 드러낼 필요가 없죠. 그러나 게이 커뮤니티 내에서 근육질의 남성 신체가 반복적으로 이상화/대상화(사실 둘은 크게 다르지 않겠죠) 되면서, 나이듦은 자신의 신체가 이 중심부에서 멀어지는 과정을 넘어 정체성이 소멸되는 과정으로 받아들여지는 건 아닌가 싶습니다. 사실상 제가 이 구간에서 가장 많은 글을 지웠습니다. 누구나 느끼는 지점을 넘어, 특별하게 느끼는 지점을 넘어, 거의 완고하게 느끼는 그 정동과 그 재현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주저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대상화 되지 않으면 소멸할 것 같은 상태’라는 문장을 쓰고 나니 서문은 점차 처치곤란한 처방전처럼 느껴졌습니다. 제목보다 더 긴 글을 쓰면 쓸수록 재현은 점차 더 얇고, 더 절박한 무언가가 되고 말더군요. 앞서 말한 것처럼, 이 전시는 전경과 제목만으로 너무 자족한다는 느낌을 받으니까요.
작품으로 눈을 옮겨 좀 더 살펴보시죠. 두 작가님은 이 욕망하는 신체를 각각 재현합니다. 청장년의 경계 위에서 끊임 없이 자기 신체, 나아가 자기 존재를 의심하고 불안해하는 게이(들)의 모습을 각각 합성 사진과 누드 드로잉을 통해 즉물적으로 재현합니다.
이때 허호 작가님의 드로잉에는 허호 작가 자신이 드러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드로잉의 대상인 인물들이 일부를 제외하면 소재적으로 남성 누드화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는 않지요. 이전 전시에서는 포로노물의 포즈를 취하고 있거나 게이 사우나에서 도촬되는 등 남성의 나체가 어떤 맥락에 놓여있는지가 보다 선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이번 전시에서 허호 작가님은 온라인 게이 커뮤니티인 ‘이반시티’의 40-50대 게시판에 누드모델을 구한다는 공고를 올리고 누드 크로키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서울로 올라오면서까지 자기 신체를 그려달라는 열성적인 모델들에게서 허호 작가님은 자신의 나이 30을 어떻게 바라보게 되셨나요? 작가님은 이번 전시기간 벽면에 걸린 자신의 드로잉 연작을 관객들에게 친절히 설명했습니다. 관객들은 쇄도하는 누드 드로잉 요구와 빨간색 속옷 등 미묘한 페티쉬를 드러내는 신체가 허호 작가님의 눈 앞에 포개지는 상상을 그때 받아들 수 있었을 겁니다. 재현자가 스스로를 재현하는 구도였달까요? 어떨 때 보면 허호 작가님의 설명이 일종의 퍼포먼스이고, 이 드로잉들은 그 무대를 구성하는 이미지들로 보이기도 했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양승욱 작가님의 사진과 오브제는 자신의 얼굴을 포토샵으로 합성한 게이 포르노의 커버 이미지나 근육질의 남성 신체로 가득합니다. 스스로 채집한 얼굴은 오려져서 자신이 원하는, 혹은 사실상 게이 커뮤니티가 원하는 신체에 달라붙게 됩니다. 외모 중심주의의 자장이 강력하게 작동하는 커뮤니티 내에서 어떤 식으로든 중심에 들어가려고 하는 노력의 발로는 사진 액자와 가짜 DVD 커버에 재현됩니다. 사실 약간의 설치가 가미되어 전시되고자 하는 욕망이 구체화되었다는 점에서 효과를 가지기는 했지만, 여기서 작업이 마무리되었다면 익살스러움이나 섹슈얼리티의 미니어처 정도로 끝나 아쉬웠을 것 같네요. 이때 제가 눈길을 돌렸던 것은 유니콘 모양이 반짝이는 스팽글로 가득 수놓인 노트였습니다. 이 노트 안에는, 작품의 원래 이미지와 더불어 각 모델의 얼굴 각도와 표정을 따라한 작가 본인의 사진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특히 스팽글 커버의 노트는 매 전시마다 창작물의 레퍼런스와 드로잉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양승욱이라는 이정표를 다시금 드러내는 장치이기도 합니다. 이 노트는 참고자료이지 재현의 연장선상에 있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다른 방향으로 자기 재현의 기반을 복잡하지 않게 비치하고 있는 것은 그리고 그런 ‘비치’시키는 방법을 반복적으로 남겨두는 지점은 자기 재현 혹은 세계관의 복선과 같은 흥미를 준다고 생각합니다.
둘 다 ‘그리는 자신’과 ‘보이는 자신’으로, 각각의 자기 신체로 소급되는 듯 합니다. 시각예술에 있어서 작품은 어떤 식으로든 그 시선이 재귀적으로 작가 자신을 향하기 마련입니다. 다만 우리는 두 작업이 작가의 신체를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을 넘어, 자기 신체를 통해 섹슈얼리티에서 나이듦까지 모두 토설하도록 만들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 때문에 전시장에 들어올 때 느끼는 강한 인상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이어집니다. 나아가 두 작업이 두 신체로 모두 소급되어 버리기 때문에 살친구라는 콜렉티브의 전시임에도 《3040》은 언뜻 보면 양승욱과 허호의 2인전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앞서 ‘두 작가’나 ‘각각’이라는 표현이 유독 많은 것은 이 때문입니다.
이것을 조금이나마 연결지어주는 장치가 유리 벽면의 불투명 시트지와 무지개 깃발, 그리고 전시장 모서리에 쌓아올린 캡슐 더미입니다. 이 중 유리 벽면에 부착되고 가리우는 면적은 불필요한 영유아와 청소년의 이동이 많은 공간에서 불협화음이 발생하는 것을 상쇄하고 전시공간을 일시적으로 퀴어 친화적인 공간으로 소개하는 장치일 따름입니다. 퀴어 사랑방으로 머무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면, 벽면보다도 캡슐을 좀 더 이야기하는 편이 나을 것 같네요. 길벗체를 사용하여 중년의 게이가 된다는 데에 대한 게이 커뮤니티의 한탄과 농담 등의 문구를 담고 있는 이 캡슐은 이제까지 살친구가 선보인 방식과 가장 가깝습니다. 수집하고, 진열하고, 집어들게 만들죠. 이처럼 작지만, 퀴어 커뮤니티의 언설을 자꾸 포터블하게 만드는 형식은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의 사탕처럼 퀴어 미술 형식의 전범과도 전략이지만, 살친구의 버전에서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전시장에 들여다놓은 러쉬 비누의 향처럼, 이 캡슐은 크게 힘주지 않아도 잔향처럼 게이 커뮤니티의 사소하지만 긴밀하고 사적이지만 커뮤니티적인 메시지를 방문한 이들에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수집과 배포라는 참여예술적인 면모를 보물찾기나 뽑기 추첨기의 형식으로 가볍게 시도한다는 점은 살친구의 이전 작업에서도 종종 드러나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모쪼록 두 작가님이 각각 시도한 욕망받고 싶어하는 신체의 재현들은 최전선에 일부러 끼어들거나, 최후방에서 기회를 놓치지 않는 방식으로 드러납니다. 그것은 느낌의 두께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앞서 표현한 것처럼 사진과 드로잉 모두 레이어를 단순화해서 얇게 느껴지는데 이때 얇은 두께가 가벼움으로 멈추기보다 맹렬한 절박함으로 표출되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소멸할 것 같은 상태”라는 말이 제 입 안에서 맴돌았고요. 이는 계속 해석을 유예하게 만드는 지점이기도 했습니다. ‘나이를 먹는 것이 두려운 게이 커뮤니티’ 정도를 환기하면서 연희동에 임시적으로 사랑방이 열리는 것은 흥미롭지만요.
몸에 대한 해석의 교환장이 활발한 나머지 존재를 쥐고 흔들어서 의심과 불안이 증폭되는 그 소재와 주제 그리고 형식은 분명 제게 제목보다 더 긴 질문을 필요로 했습니다. 혹시나 몰라 강조해서 말씀드리자면, 이 편지에서 자기 신체로 돌아가고 있다거나, 2인전 같다거나, 얇고 절박하다는 얘기는 전시에 대해서는 해석할만한 게 없다는 것이 아니라 자칫 이 평가가 작가 개인에 대한 평가가 되어버리는 난감함에 대한 표현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마나한 가지치기식 서문은 글쓰기의 효용이 너무 떨어지고요. 그래서 이처럼 편지를 쓰는 이유는 하나로 귀결됩니다. 벽면을 둘러싼 안달난 듯한 재현에 대해 문어체로 연문(衍文)을 쓰기보다 구어체로 질문을 하는 것이 이 전시장에 들어오는 사람들, 저와 두 분 작가님을 포함하여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지요. 우리는 후에 《5060》이라는 제목으로 다시 한 번 전시를 준비할 수 있을까요?
이문석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