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욱_YANGSEUNGWOOK
By 고충환_Kho, Chung-Hwan
기억의 재구성과 기호의 재구성
사진의 매체적인 특성으로 진실의 증언과 기억의 환기를 들 수가 있을 것이다. 물론 디지털 이후 활성화된 것으로 조작과 공작을 매개로 한 가상현실 혹은 대체현실의 제시 또한 무시할 수 없는 현실이지만, 전통적으로 볼 때 그렇고 전형적으로 볼 때 그렇다.
그 중 양승욱의 관심은 기억의 환기 쪽에 쏠린다. 한 장의 사진이 불러일으키는 기억의 환기를 파고드는 것. 그런데 흥미롭게도 혹은 어쩌면 당연하게도 진실의 증언과 기억의 환기는 외적으로만 구별될 뿐, 사실은 그 이면에서 서로 통한다. 기억이 환기하고 싶은 것이 진실인 것이고, 그 진실은 기억으로 소환되고 환기되는 동안 왜곡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어떻게 왜곡이 일어나는가. 쉽게 말해 기억에는 좋은 기억이 있고 나쁜 기억이 있다. 그 중 좋은 기억은 환기되는 과정에서 실제보다 부풀려지고, 나쁜 기억은 실제보다 축소되거나 아예 망각 속으로 밀어 넣어져 무의식으로 추방된다. 좋은 기억은 되새기고 싶어서 왜곡되고, 나쁜 기억은 잊고 싶어서 왜곡된다. 사진으로 치자면 사람들은 똑같은 것을 보는 것 같지만, 사실을 알고 보면 저 좋은 것만 보고 저 좋은 대로 본다(혹은 읽는다). 왜곡은 과거와 현재의 차이와 같은 시간차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처럼 진실이 소환되고 환기되는 과정에 욕망이 개입되기 때문에 일어나기도 한다. 그래서 한 장의 사진 속 기호는 언뜻 분명한 것 같지만, 보면 볼수록 오리무중에 빠지게 만든다. 그리고 그렇게 저마다의 의식 속에서 재구성되는 기억과 기호가 사진의 매력이기도 하다. 아마도 어느 정도는 사진적 진실과는 무관하게 일어나는 일이다. 최초의 진실에서 또 다른 진실이 파생되는, 해석과 관련된 일이다.
그렇게 작가는 치매 걸린 할머니를 기록한다. 흥미롭게도 치매는 기억을 상실하는 병이다. 삶이 송두리째 망각 속으로 밀어 넣어져 사라지는, 그리고 그렇게 존재가 지워지고 존재의 기억이 지워지는 병이지만, 이런 존재론적 의미를 뒤로 한 채 짐짓 말장난을 해보자면, 작가는 사진을 매개로 상실된 기억을 환기한다. 상실된 기억을 환기한다? 모순이다. 죽음을 환기할 수 없듯 상실된 기억도 환기할 수 없다. 죽음을 기록할 수 없듯 상실된 기억도 기록할 수 없다. 사진은 다만 주검을 기록하고 환기할 수 있을 뿐. 그러므로 상실된 기억을 환기하는 작가의 사진은 그 자체로는 기록할 수도 기억으로 되불러올 수도 없는 죽음의 알레고리(죽음의 재현불가능성)처럼 읽힌다.
그리고 장난감과 특히 인형. 작가는 유년의 추억을 되불러올 요량으로 장난감과 인형을 소환한다. 여기서 특히 인형은 이중적이고 양가적이다. 인형과 친구가 되고 싶다는 욕망을 충족시켜주고, 동시에 사물을 친구로 삼으면 안 된다는 금기(페티시 그러므로 사물인격체 혹은 물신금지)를 위반한 것이므로 이런 위반에 따른 처벌을 수반한다. 쉽게 말해 인간을 닮은 것들, 이를테면 인형과 더미, 마네킹과 사이보그의 이중성과 양가성이 주는 친근함과 낯설음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프로이트는 친근한 것(인형)이 낯설어질 때(인형이 사물인격체를 주장하고 드러낼 때) 두려움과 공포를 불러일으킨다고 했다. 작가는 사진을 매개로 그렇게 장난감과 특히 인형이 불현듯 내보이는 친근함과 낯설음의 접점을, 틈새를 드러낸다. 그리고 군산의 재개발지역으로 묶인 지역을 현장으로 과거와 현재를 기록하는데, 엄밀하게는 폐기된 사물들이 기억하고 있는 과거를 기록하고, 그 기억이 불현듯 현재로 호출되는 것에서 오는 낯 설은 현재를 기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