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사진’에 관한 글이다.

글 성용희

 

 

이 글은 양승욱 작가와 성용희 큐레이터의 두 번의 만남을 정리한 글이다. 두 번째 만났을 때 성용희는 몇 가지 간단한 질문들을 준비해갔었다. 대화를 통해 우리는 ‘사진’이란 무엇인지를 서로 이야기했다. 글은 두 번째 만남에서 역순을 정리했다.

 

  1. 두 번째 만남

 

두 번째 만남 역시 어색했다. 글을 쓰기 위해 우리는 무슨 대화라도 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간단한 질문들을 던지기 시작한다.

 

(용희) 사진은 왜 시작했나?

 

(승욱) 전공이 디자인이었다. 디자인에서 써야 하는 여러 소스를 만들다 보니 사진을 하게 되었다. 미대를 가고 싶었는데 입시 미술에 낭패를 봐서 미대를 진학하지 못하고 디자인을 전공했지만, 미대가 꿈이었다.

 

(용희) 그렇다면 왜 미대를 가고 싶었나?

 

(승욱) 미대는 왜 가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소질과 재능을 떠나, 표현하는것이 재미있어서 그랬던 것 같다. 그리고 나는 상당히 느리다.

 

(용희) 작업의 특성과 특징은 무엇인가?

 

(승욱) 내 작업의 특징은 작은 소재들이 계속 흘러가는 것이다. 무에서 유의를 찾아가는 것, 반응하는 것, 작업으로 표현하는 것, 생각하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용희) 어쩌면 당신의 작업을 “수행적이라서 오타쿠적”이다. 또는 “오타쿠적이어서 수행적”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대상과의 관계, 사진을 찍는 행위 등에서 일반적인 사진 작업과는 차이가 있어 보인다. 특히 사진 내의 대상과 사진을 찍는 본인과의 관계가 상당히 독특해 보인다. 그렇기에 나는 그 대상을 단순히 피사체라는 부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한마디로 사진을 찍는 행위에 감정적인 무엇인가가 느껴진다. 이것인 당신의 작업을 읽는데 가장 핵심적인 부분일 것이다.

 

(승욱) 사진을 보는 관객의 경험과 사진을 만들기 위해서 작가가 가지는 경험은 다를 것이다. 많은 사진이 장난감을 다뤘는데 나는 이 대상에게 이중적이고 양가적인 감정을 가졌었다. 장난감은 갖고 싶은지만, 같이 있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던 무엇이다.

 

어릴 때 형이 병으로 죽었는데 우리 집은 기독교 집안이라 엑소시스트를 모시고 왔었다. 이분은  장난감이 귀신에 씌었다 하면서 모두 다 버리라고 했었다. 여기서 결핍이 시작한 것 같다. 복잡한 감정이 뒤섞이게 되었다. 좋아하는 것을 가져도 반대의 감정이 늘 함께 한다.

 

(용희) 나는 사진을 확대해서 말하고 싶다. 최종적인 이미지가 아닌, 사진들을 찍기 위한 다양한 행위들과 감정들이 감히 사진이라고 말하고 싶다.

 

(승욱) Toys 시리즈 작업을 하기 전까지 나는 내가 장난감에 대한 집착이 있었는지도 몰랐었다. 아무리 모아도 채워지지 않는, 양적으로도 질적으로도.

 

(용희) 나는 주 관심사가 퍼포머티비티(performativity) 즉, 수행성이기 때문에 당신이 사진을 찍기 직전이 행한 여러 행위 그리고 세팅에 계속 눈이 간다. 오브제의 구성, 그리고 촬영 이후 디스플레이 방식까지도 말이다.

 

(승욱) 저장강박증, 호더스(hoarders)를 차용해서 작업했었다.

 

(성) 당신이 종종 보여주는 책이라는 매체도 비슷한 것 같다. 책은 어느 정도의 내용과 볼륨이 있어야 한다. 당신의 사진은 디스플레이 방식에서도 저장강박을 드러내기 위해 책을 다루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하지만 그 덕분에 당신의 사진, 전체로서의 사진은 독특함을 가진다. 그것은 사진과 책의 교차지점을 형성해 낸다. 이는 사진책과는 사뭇 다르다. 죽어도 버리지 못하는 강박이 이 둘 사이를 심각하게 왕복한다. 그 결과 사진이자 책이면서, 동시에 사진도 책도 아니게 된다. 그 교묘한 자기부정 혹은 이중부정이 당신 작업의 특성일 것이다.

 

(승욱) 디자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계속 돌아다니면서 무차별적으로 찍고 집에 가서 이를 쌓아둔다. 심지어 내 사진의 구도 역시 늘 일관되어 있다. 이는 피사체에 대한 집중이다. 많이 찍고 많이 보여주고 이를 책으로 엮으면서 극단적인 양 끝을 오고 간다.

 

(용희) 나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 관심을 가진다. 그리고 그것이 이 전체적인 과정을 바로 ‘사진’이라고 부르고 싶다. 어떻게 시작했고, 어떻게 세팅을 했으며, 어떻게 보여주고, 어떻게 책으로 만들어지는지 등, 이러한 대화를 통해 느낀 아쉬움은 당신의 사진이 이러한 앞뒤의 흔적을 잘 남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승욱) 다른 동료 작가들과 논쟁이 있었는데, 그 내용은 내가 리서치 과정을 보여 주지 않는다는 비판이었다.

 

(용희) 당신의 사진 디스플레이는 설치에 가깝다. 어쩌면 사진-설치 작가라고 불러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지금까지는 전체 프로세스 중에서 극히 일부를 보여줬지만, 앞으로는 보여주는 범위를 넓혀보는 것이 어떨까 싶다. 사진에 대한 작가의 입장을 정리할 시간 혹은 시점이 된 것 같다.

 

 

  1. 첫 번째 만남

 

나는 미술관에서 다원예술과 융복합을 맡고 있다. 미술관에 합류하기 전에도 주로 극장이나 페스티벌에서 일했고 가끔 미디어 아트 전시를 맡고 했었다. 사진이란 매체와 아주 친숙하진 않다. 양승욱 작가를 처음 만난 날 우리는 서로 어색해했다. 비슷한 분야나 공통점을 가지지 않았고 사교적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어색함은 점점 커져서 이 만남 자체를 의문시한다. 도대체 이런 프로그램은 왜 하는 것일까. 퍼포밍 큐레이터와 사진작가는 무슨 이야기를 시작해야 하는 걸까. 그리고 어떤 이야기기로 마무리 지어야 하는 걸까. 시작부터 어긋난 이 관계에서 우리는 무엇을 얻어 갈 수 있을까.

 

개괄적인 이야기를 지나, 민망한 자기 고객들이 조금씩 오고 간다. 그 작은 고백에서 나는 양승욱 작가의 사진이 매우 사적인 이야기들의 묶음이자 파열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은 마치, 유추할 수는 있었겠지만 다가가기는 어려운 문 너머의 어떤 지점과도 같았다. 내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인간관계가 그의 작업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게 해주었다는 뿌듯함이나,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는 작업의 깊숙한 무엇을 내가 알아차렸다는 내밀함은 아닐 것이다. 그의 사진은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이미지로써 사진 그 이상의 초과가 있고, 이 넘침이 주는 독특한 느낌이 과연 무엇일까, 이는 규정하거나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첫 번째 만남부터 아무도 우리는 복잡한 질문에 봉착했을 것이다. 그에게도 그랬을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나에게는 그랬다. ‘사진은 무엇일까?’ 또는 ‘양승욱 작가에게 사진은 무엇일까’ 라는 근본적인 질문들 말이다.

 

 

  1. 두 번의 만남 후에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나는 그의 사진을 넓게 본다. 그것이 내가 사진을 정의하는 방식이기도 할 것이다. 마치 다워예술처럼, 한 편의 퍼포밍으로 그의 ‘사진 행위’를 상상해 본다. 나는 그가 어떤 마음으로, 어떤 사회적 행위자/배역(actor)으로, 또는 얼마나 자기 자신으로 카메라를 들고 길을 나섰는지를 상상해 본다. 그리고 홀로 하지만 크게 외롭지 않은 한명의 호더이자 수행자로 엄청나게 많은 이미지와 물건을 수집하는 모습을 그려본다. 그는 다시 어떤 곳으로 돌아와서 그 오브제를, 이미지를 다시금 정교하고 정밀하며 동시에 외설적으로 (성적인 의미보다는, 과잉, 과다, 지시하는 것이 없는, 방향성이 없는, 또는 몸이 없다는 의미에서) 저장하는 모습을 그려본다. 그리고 그러한 저장을 물질적으로 체계화하는 디자이너로서의 그의 모습을 바라본다.

 

이는 내게 많은 질문을 던진다. 사진이라는 그의 행위가 일반적인 내러티브와 무대를 벗어나 방향성 없는 과도함과 지나침으로 계속 될때 나는 이 공연을 무엇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