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캉캉> 듀킴, 박진희, 양승욱, 유성원 4인전

서문 <‘사람’을 위한 규칙> by 유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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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춤법은 우리가 글을 올바로 읽고 쓰기 위해 지켜야 하는 어법이다. 하지만 그 규칙에 맞추어 글을 쓰더라도 맥락을 모른다면 읽어낼 수 없는 의미들이 있다. 보이지 않는 것들, 배제된 것들, 떠오르지 않는 것들, 감춰진 것들이다. 반면에 우리는 특정한 단어의 조합이나 배열이 파괴되었어도, 약속이 불완전해도 어떤 의미들은 직관할 수 있다. 읽는 이는 읽고 싶은 이야기를 내면에 지니고 있다. 그는 알아챌 수 있는 신호를 찾아 헤맨다. 읽는 행위를 통해 그 욕망과의 접점은 ‘발견’된다.

‘크루징(Cruising)’이란 공원 화장실, 사우나 같은 일상적인 공간에서 성적 욕망을 가진 남성들이 서로를 알아보고 성접촉을 하는 행위다. 그것을 눈치채기 위해선 동일한 욕망이 먼저 있어야 한다. 어떤 남자는 다른 남자를 ‘그렇게’ 쳐다본다. 자신과 동일한 눈빛을 찾기 위해서. 말 없는 거절과 수락의 신호들은 공간을 성적 암시로 물들인다. 누군가는 자신을 사용해줄 사람을 간절히 찾고 있다. 어떤 남자는 동성에게 사정하길 원하고, 다른 남자는 그 정액을 먹고 싶어한다. 어떤 남자는 다른 남성의 항문 안에 싸길 원하고 또다른 남자는 항문 안에 사정 당하고 싶어한다. 그렇게 욕구와 욕구가 꼭맞게 결합하는 크루징의 공간은 마치 ‘낙원’처럼 보인다. 그러한 만남이 이루어진다는 메시지는 지도에 표시되지 않는다. 그런 곳이 존재한다는 흔적을 낙서로 얼룩으로 소문으로 전할 뿐이다.

이러한 욕구들은 가시화되는 순간 비정상적인 것, 병리적인 것으로 분류되어 그 실천을 비난받기 쉽다. 단일한 이성 파트너가 아닌 익명이고 다수인 동성과 갖는 성행위를 향한 가치판단과 인간의 취약성을 관리해야 할 조건으로, 질병을 위험으로 인식하는 태도에서 나오는 혐오는 ‘우리’와 그들 사이를 선 긋기 한다. 우리라는 관계에서 떨어져 나와 기꺼이 익명이 된 파편화된 얼굴들은 자신의 사회적 정체성은 그대로 보존하는 방법으로 성행위만을 하고 돌아간다. 내가 남자에게 성기를 빨린 남자라는 사실을 말하지 않는다면 여전히 이성애자인 것처럼 보이고 생활할 수 있는 바깥으로. ‘집’에 돌아가면 아버지이고 남편이고 아들이 되는 그들은 잠시 다른 곳에서 ‘배설’한 것이다. 즐거움은 누리되 부담은 짊어지지 않기로 합의한 곳에서.

이름도 연락처도 물을 필요 없는 공간. 우리가 용변을 보는 변기에 이름을 기대하지 않는 것처럼, 전 인격체가 아닌 입으로 성기로 항문으로 존재하는 순간. 똥을 싸는 곳에서 똥을 싸는 부위로 섹스하는 경험, 남자이면서 같은 동성인 남성의 정액을 먹는 경험은 그러한 행위를 하지 않는 사람과 자신을 구분 짓게 한다. 나는 당신과 다르다고. 나는 나와 같은 사람을 찾고 있다고. 말할 수 없고 감추더라도 그 경험은 그를 이전과 같은 삶 안에 머물 수 없게 한다. 그는 겉보기에 남들과 다를 바 없지만, 그 차이를 발견되길 원하며 공원을 사우나를 서성인다.

2

HIV 비감염인을 위한 사전 예방 요법(PrEP, Pre-Exposure Prophylaxis)에 쓰이는 트루바다(TDF 300mg/FTC 200mg)가 한국에서 예방 목적의 적응증 허가(2018년 2월)를 받고 HIV 감염인의 동성 파트너에 대한 급여 적용(2019년 6월)을 끌어내는 등 대중화 단계를 밟고 있다.
또한 치료받는 HIV 감염인은 타인에게 바이러스를 전파할 수 없다는 사실(U=U, Undetectable=Untransmittable)은 상식이 되어가는 세상이지만 아직도 ‘동성애 하면 에이즈 걸린다’ 따위의 구시대적인 막말을 적극적으로 재생산해내는 한국 사회에서 에이즈는 낙인과 몰이해의 정점에 있다.

성에 대한 활발한 실천은 사회적 낙인뿐만 아니라 개인의 몸에도 성병 감염에 대한 부담을 안긴다. 그것은 성병의 종류와 이해, 정확한 예방법을 교육하고 숙지해야 하는 문제이지만 성소수자로서의 삶을 긍정하고 미래를 상상하는 대신 수치심을 느끼고 다수에 맞춰 행동을 교정하도록 만들어진 사회 환경은 성병을 개인 특성에서 오는 ‘문제’로 바라보게 한다. 저질의 농담, 악의적인 모욕에 동원되는 질병이나 소수자에 대한 부정적인 수사는 이런 잘못된 태도를 강화한다. 이러한 시선은 보건의료 영역에서 소수자가 겪는 구체적인 차별로 이어진다. 자신에게 필요한 의료 조치를 안정적으로 받을 수 없다면 그 누가 자신의 건강을 유지할 수 있을까. 조기 검진 및 조기 치료, 감염취약군에 대한 예방약 접근성 확대 등 예방법으로서의 치료(TasP, Treatment as Prevention)로 에이즈 대응 패러다임이 바뀌었다는 사실(세계보건기구 HIV 예방 가이드라인, 2013)을 명심해야 한다.

즉 U=U 슬로건의 “세번째 U, 불평등(The Third U, Unequal)”을 기억해야 한다. 감염인이 타인에게 바이러스를 전파할까봐 우려한다면, 그 이전에 그가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 있었는지, 그럴 수 없었다면 무엇이 치료에 있어 장벽으로 작동했는지 살펴야 한다. U=U는 이제 그럼 안에 싸도 되느냐는 물음의 답이 아니라 상대(U)의 상태와 처지가 어떠한지 살피라는 하나의 질문이자 메시지가 되어야 한다. 일상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지 못하고, ‘남자와 여자가 만나 사랑하는 것이 자연의 섭리’라고 운운하는 보수세력의 혐오발언이 기승을 부리는 현실에서 이들은 어떤 공간에서 어떤 방식으로 누구와 관계맺고 있는가? 이들은 서로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관계일까? 커뮤니티 바깥에 존재하는 익명성, 파편화된 관계는 상대방에 대한 관심과 책임, 의무를 포기하게 하는 조건처럼 보인다.

3

대한민국 헌법 제11조 제1항은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라고 말한다. 국가인권위원회법 제2조 제3호에는 ‘평등권 침해의 차별행위’로서 합리적인 이유 없이 성적 지향 등을 이유로 고용·교육·재화·용역·토지의 이용 등에 있어 불리하게 대우하는 행위를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법은 보호해야 할 사람과 아닌 사람을 정확히 구분하며 대상이 누구인가에 따라 차별적으로 작동한다.

우리나라 국민은 직업 선택의 자유와 근로의 권리(헌법 제15조, 고용정책기본법 제3조)가 있으며 HIV 감염인의 노동할 권리는 법으로 보장받지만(후천성면역결핍증 예방법 제3조, 국가인권위원회법 제2조 제3호 및 고용정책기본법 제7조) 직무 수행력과 상관없는 노동자의 HIV 감염 사실이 사업주에게는 부당해고의 명분이 된다. 질병에 대한 잘못된 편견이 팽배한 현실에서는 의사 등 전문가의 판단이 아니라 사업주의 자의적 기준으로 채용 및 해고 여부를 결정하기도 하며 HIV 감염인은 소문이 나기 전에 그만두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는 인사담당자의 ‘조언’을 듣는다. 질병에 대한 오해에 소수자를 향한 편견이 중첩된 현실은 문제 제기할 의지를 체념시킨다. 나 하나가 포기하는 것은 세상을 바꾸는 것보다 쉬운 일이기 때문에. 군인 신분의 남성이 합의하고 성인끼리 항문 성관계를 한 것은 법으로 처벌받지만(군형법 제92조의 6), 남성 동성애자라고 하여 국방의 의무를 면제해주는 것도 아니다.

위계에 의한 이성끼리의 성폭력은 용인해도, 합의한 동성 간의 섹스는 비정상이 되는 세상에서 남성 동성애자가 성병에 취약하다는 사실은 정책 마련의 필요성으로 이어지는 게 아니라 차별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된다. 오른손잡이가 만든 세상에서 왼손잡이를 위한 설계는 비용으로 간주하지만 이 둘은 같은 사회에서 생활해나가야 한다. 오른손잡이는 의식할 필요 없이 달린 문의 손잡이를 열 때마다 겪는 스트레스. 왼손으로 문을 잡고 밀어서 열거나 당겨본 적이 있다면 알 것이다. 문은, 오른쪽을 위해 열린다. 특정 집단이 비인간화되어 있다면 과연 그것이 이 개인의 특성인지 구조적으로 배제당한 것인지 살펴보아야 한다. 우리 사회에 소수자를 위한 구성원의 자리는 어떠했는가 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이것은 사회의 약속이 작동하는 방식과 그 체계의 구성원이 누구인가를 드러낸다. 어떤 사람은 약속을 충실히 수행함으로써 그 사회에 속하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배제되었다는 사실을 체험하게 된다. 사랑이라는 감정에 설렘 대신 두려움과 금지를 느껴야 했을 때부터. 그런 사람에게 사회가 허락한 공간은 어떤 풍경을 하고 있는가? 다른 사람은 할 수 있는데 ‘나’는 할 수 없다고 느껴야 하는 일의 목록은 무엇이 있는가? 그 한계들을 하나씩 써나가며 사회에서 ‘사람’으로 간주되기 위해 어떤 조건이 필요한지, 이곳에서 ‘나’는 ‘사람’으로 죽을 수 있는지 질문한다. 알 필요도 없고 몰라도 되는 무관심의 권력. 말해도 닿지 않고 들리지 않아 침묵해야 했던 순간에 ‘표준’어로 읽고 쓰기 위해 만든 규칙으로는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번 작업은 그 ‘사람’을 위한 규칙을 발명하고 상상한 과정의 기록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