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한 기억 위를 미끄러지는 유리벽장의 쾌락

by 남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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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순간을 포착한다’는 전형적 서술은 시간이 분과 초 이하의 단위로 쪼개질 수 있으며, 그 단위는 셔터 속도에 좌우됨을 전제한다. 더불어 시간이 실재하는 공간에 밀착해 있으며, 사진은 유동하는 공간을 인화지에 ‘장면’으로 동결시킨다는 설명 또한 포함한다. 하지만 사진이 포착하려는 순간과 인화지에 담긴 순간은 동일한 것인가? 포착은 셔터를 누르는 순간만을 지칭하는 것인가? 특히 디지털 사진의 경우, 액정 위에 맺힌 이미지는 보정과 첨삭, 합성 등의 변형 기술에 쉽게 노출된다. 공정을 거친 이미지는 사후적으로 기억을 조작하기도 하며, 기억을 조작하기 위해 공정을 가하기도 한다. 사진은 기억을 미끄러지며, 기억의 본질을 거스르기도 한다는 명제에 반기 들기는 어려울 것이다.

양승욱 작가의 사진에는 기억이 관통한다. 다만 작가는 기억을 포착하기보다 포착할 수 없음을 전제하며, 포착 불가능성을 설치하고 배열하는 시각언어에 집중한다. 상이한 시리즈들은 일견 일관성 없어 보이지만, 그럼에도 작가는 끈질기게 기억을 물고 늘어진다. 다만 그가 보여주는 것은 기억 자체보다 기억이 남는 과정과 기억을 장치에 대응시킨 결과물이다. 말하자면 그의 작업은 기억이 투명한 시간으로 남을 수 없는 상황에 기억을 표상하고 가리키는 과정으로서 사진술이다.

과거를 기억으로 남기고 환기하는데 있어 작가는 장난감을 주요 소재로 삼는다. 그에게 장난감은 특정 경험을 몸에 각인시키고 의미를 부여하는 매개물이다. 하지만 기억과 장난감을 굳이 일치시키지는 않는데, 그가 수집하는 장난감은 대개 남의 것들이라는 점에 기억의 지표성은 어긋나 있다. 다수의 장난감은 작가 본인에게 고유한 기억이 부여되지 않은 것들이며 쓰임을 잃고 세상에 나오거나 더러는 버려진 공장제 생산물이다. 특정한 기능과 용도를 다하고 버려졌을 장난감은 이름도 쓰임도 지워진 채 구체적인 기억이 표기 되기는커녕 기억의 관념만 남아 있다.

그는 장난감에 일일이 특수한 시간을 부여하고 의미매기기보다 출처 다른 장난감들을 한데 모아 인화지 안에 집합시킨다. 대표적으로 <Fast Toy> 시리즈는 호로 바쿠이(horror vacui)를 떠올릴 만큼  강박적으로 모은 장난감을 장소에 빼곡하게 채워 넣는다. 그토록 채우고자 하는 빈 공간은 작가에게 어떤 장소인가. 작업을 소개하는 텍스트마다 항상 따라붙는 것은 작가의 개인사 내지 에피소드들이었고, 대개는 떠난 가족들의 사연이었다. 그리고 장난감은 기억을 연상케 하고 연결시키는 매개로 작동하는 것처럼 설명되었다. 하지만 뒤늦게 붙여진 작가의 주관적 기억은 소재들과 합을 맞춰 기억 자체를 붙들기보다 애먼 장난감 위에 겨우 얹혀 있는 모습이다. 도배하다시피 장소를 가득 메운 장난감에 그가 소환하는 개인사는 무겁지만, 정작 장난감은 손아귀를 빠져나간 기억의 세포들을 다시 모으는데 쓰이는 대리 표상에 지나지 않는다.

장난감은 상품시장에 균일한 사이즈와 외양으로 대량 생산된 사물이다. 장난감과 상품 시장은 각기 표면과 질감으로부터 기억을 환기시키는 ‘미니어쳐’와, 우리를 에워싸지만 그 전체를 관망할 수 없는 ‘스펙터클의 세계’라는 양극단의 조우를 그려낸다. 상반된 스케일의 속성들은 극적으로 교차하는데, 가령 수잔 스튜어트는 둘의 적대적 관계가 동시에 충족되는 예로 핵에너지를 든다. 핵에너지는 가장 작은 추상성(분열된 원자)과 가장 큰 추상성(기술에 의한 세상의 종말)을 결합시킨다는 점에서 기술적 추상화가 가장 극단적으로 구현된 사례라는 논지이다. 기억을 구성하고 적어도 환기시키는 원자 단위의 장난감들이, 극단의 지점에서는 기억을 ‘기억 팔이’, ‘기억 산업’으로 재배치하고 소비재로 재생산한다. 이는 곧 장난감 뿐 아니라 장난감을 빌어 환기하려는 기억의 실체 역시 자본주의 시장 시스템, 언어의 체제를 통해서만 환기할 수 있는 것은 아닌지 물음을 던진다. 마르셀 프루스트가 과거의 시간을 섬광처럼 조우할 수 있었던 마들렌의 맛부터, 나의 경험과 무관하게 과거-스러움에 천착하며 유행과 시장을 만드는 ‘레트로’ 취미까지도 인공의 산물인 바, 그것은 언어로 형언할 수 없는 기억의 외상이 미디어의 수다한 기표들과 기억 산업을 통해 사후적으로 보존되고 동시에 변형되며, 몸에 각인된 흔적을 확인시켜주거나 더러는 나와 무관한 집단의 경험에 연결됨을 시사한다.

기억을 미끄러지는 기표로서 장난감은 본래 기능보다 기억을 매개하는 사물로서 전시가치를 부각한다. 귀엽고 낡은 형상들은 과거를 소환하는듯 보인다. 하지만 장난감의 자리는 그가 구술하는 기억의 주소와 같지 않다. 인형의 텅 빈 눈과 경직된 몸, 끊임없이 나열된 장난감의 홍수 속에 관객은 주어진 작가의 기억과 작품 간 조우를 거절당하기 쉽다. 여기에 더해 사진이 갖는 매체적 속성은 기억과 사물 간 불일치를 평면으로 납작하게 만든다. 작가는 매끈한 플라스틱 표피에 기억을 붙들어 물신으로 삼기보다 한 장의 사진으로 압착한다. 사진은 시간을 두께 없는 장소로 압출하는 기술이라는 점에 기억을 복원하기 위한 노력을 사전에 꺾어버린다. 망각 당하고 버려진 장난감에 작가의 기억이 머물 자리는 없다. 아니, 적어도 기억이 어색하게나마 얹혀 있다고 한다면 그 자리란 다른 이름의 자리, 시간의 때가 묵은 흔적으로서 유사-과거의 자리, 이름을 잃고 ‘기억’의 추상으로 퇴색해버린 익명의 자리, 추상적인 동일시로 어긋남을 가리는 착시의 자리이다.

시간을 미끄러지는 사진 작업의 속성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그의 또 다른 시리즈 <Nothing Last Forever>는 조부모의 임종 과정을 밀착해서 기록한 작업이다. 할머니의 임종 직전 얼굴이 있고, 할머니를 보낸 할아버지의 마지막 모습까지 기록한 사진에서 누군가는 화면을 뚫고 나온 정지된 시간의 구멍으로서 푼크툼(Puctum) 내지 순간적인 포착 속에 영원히 침묵을 지키는 얼굴로서 가깝지만 다가갈 수 없는 아우라(Aura)를 떠올릴 수 있다. 이는 두가지 기술을 적용한 사진의 효과를 통해 예상할 수 있는데, 한편으로 플래시를 터뜨려 인물을 부각한다면, 다른 편으로 비네팅(Vignetting) 효과를 줌으로써 현장으로부터 거리 두는 것이다. 피사체에 집중된 화면이 모서리의 그늘과 대비하여 긴장을 높인다. 하지만 수십 장의 기록들은 특정한 화면이 지니는 순간의 강도이기보다 연속된 시간 위에 변화하는 얼굴들의 아카이브에 가깝다. 그의 작업을 다큐멘터리 사진으로 분류한다면, 이는 세계에 밀착하여 관찰하고 기록함으로써 지나간 시간을 증언하기보다, 붙잡을 수 없음을 반복적으로 기록하는 작업이라는 설명이 더 적확하다. 사진의 기록들은 상실의 자리, 상실의 존재보다 상실에 대한 재현 불가능성의 흔적으로서 시간을 미끄러져 친밀함의 기록으로부터 익명의 과거로 빠져나간다. 주목할 점은 이를 대하는 작가의 태도이다. 조부모의 임종을 담는 과정에 작가는 얼굴을 근거리에 대면하고 남긴 기록들을 작가의 홈페이지에 게시한다. 통상적인 고인 노출에 대한 부담의 무게를 짊어지며 작가가 드러내고자 했던 것은 무엇인가. 이는 앞선 장난감 시리즈의 강박적 배열 저변에 텅 빈 얼굴을 마주하며 쥘 수 없는 기억의 고통을 덤덤하게 끌어안는 것은 아닐까. 친근하지만 낯선 장난감의 몸은 서사를 빠져나가버린 채 화면 위로 현현하는 얼굴들에 오버랩 된다.

부재하는 기억과 내 것이 아닌 소재들을 엮는 작가의 사진은 침묵을 영속화하거나 알록달록 귀여운 모습으로 빈 공간을 채운다. 기억은 관념으로 남고, 장난감들은 버려지거나 어딘가 잠겨버릴 것이다. 사진은 아무것도 남지 않음을 보이면서도 처연하거나 알록달록하게, 또는 처연하게 알록달록한 빛을 발하며 가열차게 흔적을 증언한다. 그 위에서 기억은 작품이 되고, 기억의 산업을 작동시키는 소비재가 될 것이며, 때로는 기억의 의미체제로부터 해석과 포착을 거부하는 어긋난 형상으로 남을 것이다. 그리고 시간의 구체적 결들이 잠식되고 개인의 서사가 함몰된 틈으로 애도의 감각이 집단에 감돈다.

작가는 장난감을 모자이크 채우듯 하나씩 배열하고 긴 시간 할머니의 얼굴을 응시한다. 그의 사진은 셔터 누르는 순간만 포착의 공정으로 계산할 수 없다. 한 장의 사진은 장난감을 모으고, 장소를 골라 장난감을 채워 넣는 작가의 노고를 포함한다. 임종의 순간 이후까지도 기록해 전시하는 필사적인 수행은 재현의 윤리 언저리를 서성인다. 그럼에도 작가는 기억의 실체를 환기하고 붙들기보다 항상 어긋날 수밖에 없는 회상의 결과를, 기억의 자리에 놓인 텅 빈 얼굴의 (비)시간을 드러내고자 기억을 소환한다. 그리고 평면에 인화된 기억은 사후적으로 작가의 입으로 회고된다. 그나마도 그가 제시한 표상과 미약하게 연결될 뿐 얼굴은 기억의 제한된 언어의 그물에 온전히 여과되지 않은 채 시야에 머문다. 흘러 넘치는 얼굴들의 빈 자리를 꾸준히 포착하는 시간과 손길은 그가 기억을 더듬는 방식이자 기억의 빈자리를 확인하기 위한 고된 과정이다.

사진과 함께 언급되는 과거의 기억은 필사적으로 경험을 좇거나, 부재의 기억을 평면에 압착한 대체물의 집적으로 남는다. 부여잡을 수 없음을 부여잡기 위한 시도로서 사진 속 시간은 장치를 통해 기술되지만 불가능을 예비한다. ‘못 버리는 애’가 계속 지니고 있는 무게 없는 기억은 공간 가득 채우는 장난감들이 표상 하듯 보이지만 안착하지 못한다. 작가는 실패함을 알면서도 기억을 끊임없이 발화하며, 동시에 상이한 출처의 장난감들을 수집하고 끼워 맞춘다. 버리지 않지만 손에 쥘 수도 없는 기억을 쥐고 있는 작가의 다른 손에 장난감들이 기억의 무게에 무심한 듯 텅 빈 명랑한 표정을 짓는다. 둘을 함께 가질 수 없음에도 놓지 않는 작가의 시선은 어디를 향하는가.

2

‘공;간극’은 2017년 12월 대림상가 초입에 문을 열었다. 통유리벽으로 둘러싸인 작은 공간은 전자 · 음향기기를 파는 상가 한복판에 있다. 전시공간이 들어서기 이전의 장소는 비슷한 성격의 공간이 아니었을까 예상할 수 있으나 추측만 가능할 뿐, 사방이 트인 공간은 주위 맥락을 닫아둔 채로 문을 열었다. 여기서 작가는 <유리 벽장(Glass Closet)>(5.7 – 5.26)을 제목으로 붙여 개인전을 진행했다.

유리 벽은 작품이 기댈 공간을 제공하지 않아 평면 작업을 전시하기에 제약으로 작용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설치를 모색하는 조건이 된다. 작가는 조립식 행거와 옷걸이로 진열대를 가설하여 ‘벽장’의 단어적 의미에 재치를 가한다. 예의 옷장들처럼 벽면과 벽면, 그 사이 공간에 사진들을 빼곡하게 설치하여 비교적 많은 양의 사진작업들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전시 방식은 흡사 <더 스크랩(THE SCRAP)>이나 노상호 작가의 <pic>를 비교대상으로 떠올릴 법 하다. 다만 <유리 벽장>은 위의 작가들처럼 판매와 전시를 겸하는 용도보다 공간 활용에 제한조건을 압축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방편에 가깝다. 예의 배치는 그간 장난감을 강박적으로 모으고 배열하고 셔터를 누른 작업의 연장선으로 그려진다. 장난감 가득한 납작한 인화지를 펼쳐놓은 듯한 전시장은 레이어들로 집적되어 있다.

<유리 벽장>에 작가는 사후적으로 소환되는 기억을 소재삼기보다 소재와 배치가 엇갈리는 사이-공간에 쾌락과 유머를 적용한다. 발터 벤야민이 논한 사진술이 세계와 인간 사이 소외로 부터 정치적으로 훈련된 시각에 세부 내용들을 드러내도록 한다면, 작가는 세계와 인간 사이 소외의 자리에 규범을 비트는 욕망과 쾌락을 적극적으로 투여한 셈이다. 그간 작가의 사진 작업이 기억과 소재 사이 거리를 유지해왔다면, <유리벽장>은 작품을 올곧이 감상하기 어려울 만큼 작품과 관객 사이 물리적 거리를 극단적으로 좁혀 놓는다. 이는 인화된 장면뿐 아니라 사진의 물성을 강조하고 표면 위에 가한 변형들에 시선을 고정시킨다. 사진 위에 스티커를 붙이거나, 상들을 파편으로 쪼개고 합성하는 등 가공을 거친 이미지들은 기억과의 조우에 실패하는 때늦은 애도로부터 극적으로 전환하는 듯하다. 잡을 수 없는 기억의 표상에 천착하기보다 사진의 표면에 즉각적인 변형을 가하는 작업은, 비실체적 기억을 반추하기보다 기억이 구성되는 체제에, 기억이 시각적으로 환기되고 의미부여되는 시도가 필연적으로 실패하는 지점 자체에 주목하고 개입하는 시도이다.

바로 이 어긋남, 변형되고 실패하고 미끄러지는 자리에 작가는 제 욕망의 정체를 드리운다. 남들은 다 알지만 공식적으로 드러내지 않으며 정체성을 감추는 상황을 일컫는 ‘유리 벽장’은, 거꾸로 모든 기운을 뿜어내지만 외부에서는 온전히 알아보지 못하는 상황으로 변주되어 나타난다. 이는 성별 규범을 비틀고 패러디 하는 작업에 아는 사람만 알아보는 동성애적 쾌락, 젠더 위반과 전환의 쾌락을 더한다. 선정적으로 연출된 반짝거리는 이미지를 보고 상인들이 불만을 표출 했다거나 전시장에 찾아와 성인물 영상을 찾은 이가 있었다는 해프닝은 우연만이 아닌 셈이다.

전시는 말장난과 변형, 패러디와 합성으로 가득하다. 한편으로 성경의 바이블을 ‘B’romance ‘I’s ‘B’oys ‘L’ov’E’로 풀어내기까지 머리를 싸맸을 작가의 고충을 읽는다. 국민일보에서 출간한 93년판 <만화 성경- 창세기편>에 영화포스터 100장을 끼워 넣은 작업은 한국영화의 브로맨스 홍수 속에서 마초 남성들이 반라의 만화 캐릭터들과 부딪히며 묘한 기류를 만든다. 성경을 엉성하게 비틀어낸 모습은 애매한 내용과 해석을 필요로 하는 지점들에 개입한다. 프레임과 프레임 사이, 혹은 특정 페이지에 틈입하는 남자의 몸과 얼굴에는 진지함이라는 것이 폭발한다. 하지만 만화책과 병치된 극단적 진지함은 외려 그의 얼굴을 우습게 만든다.

동성 성애의 이미지들은 곧이 곧대로 시각화되기보다 일련의 변형과 가공을 거치는데, 그 과정에 작가는 젠더 규범과 표현을 의도적으로 어긋내고 미끄러지며 골계(滑稽)의 감각을 펼쳐놓는다. 전시장 둘레 통유리에는 메이크업 어플 로 화장한 남자 모델의 인형을 맨 얼굴 이미지와 앞뒤로 맞대어 놓았다. 온라인 대전 액션게임 ‘코즈믹 브레이크’의 남성적 캐릭터 ‘드라켄’을 ‘드랙하는 켄(<DragKen>)’으로 둔갑시켜 놓는가 하면, 심각한 표정의 영웅 캐릭터들을 조작해 성교하는 모습을 연출하거나, 구글링한 이미지들을 확대하고 쪼개어 배치함으로써 성적 상상력을 높인다. 영웅 시리즈 장난감들은 극대화된 남성성을 표현하지만, 여기서의 남성성은 정전과 표준을 설정하고 따르기 보다 주관적이고 때론 작위적이기까지 하다. 남성 히어로들은 인어와 외계인의 모습이고 강철 인간과 거미 인간, 스머프와 괴수의 모습을 하고 있다. 다양한 캐릭터 속에 남성성의 스펙트럼은 넓어지고 그만큼 인공적인 속성이 부각된다. 더욱이 대량 복제된 장난감은 원본으로부터 축소되고 열화된 모습을 갖는데, 그 사이 남성성은 우스꽝스러워지고 조작 가능한 코드로 번역된다. 대량생산된 장난감들의 양적 압도는 <Play Toy>에서 다양한 체위의 합으로 변주된다. 작가는 캐릭터 모형들을 짝지어 굳이 성교 자세를 연출한다. 어둠 속 저마다 플래시 터뜨린 사진은 확대인화되어 수십 장씩 나란히 전시된다. 눈치 빠른 관객들이라면 플래시에 비친 줌인 된 형상으로부터 어둠 속 성교가 들켜버린 듯한 효과를 읽어내며 밤중에 도시의 후미진 장소를 배회하며 크루징하는 풍경 내지 게이사우나의 공간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작가는 최초의 인간과 최초의 죄인, 최초의 남성으로부터 시작된 수다한 영웅들에게 남성 동성 성애적 욕망을 강하게 투여한다. 기존 의미 체제를 비틀어 동성애적 쾌락을 이끌어내는 것은 오랜 퀴어 재현의 비생산적 생산, 선적 서사성을 파열시키는 시간성을 관통한다. 동성애를 드러내고자 이성애 중심주의의 성별이분법적 젠더 표현을 소환하는 방식은 기존 재현의 전형적인 코드를 따른다. 동성애적 욕망은 이성애적 재현 체제에 교란과 전유의 전략들을 통해 발화되는데, 욕망은 욕망 자체의 이름보다 비켜서고 짜깁고 이접하고 패러디함으로써 표현되는 것이다. 여기에 작가가 쾌락을 표기하는 대상이 공장제 대량 생산물이고, 그마저 사진을 통해 사물의 무게마저 압축시키는 점은 전통적 재현 위에 새로운 가지를 친다. 작가에게 쾌락은 일회적이고 변형 가능한 소재들을 통해 발현한다. 이는 동시대 정신 분산적 쾌락의 일면을 보이는 동시에, 쾌락의 소재가 부재하는 기억에 천착해온 그간의 작업을 반전시킨 결과물임을 상기시킨다. 사라진 자리를 기록하는 아이러니는 이제 기억을 구성하는 지배 규범으로부터 구멍을 내며 무게 없는 변형 가능성을 만개한다.

작가는 사진 속 장난감들에 동성애적 함의를 끼얹는 것에 나아가 설치물로서 사진 자체를 관찰자에 밀착시킨다. 이미지를 읽기 위한 거리가 전시에는 확보되지 않는다. 이는 평면 이미지 자체를 오브제로, 공간을 구성하는 건축술로 확장하는 작가의 의도 속에 전시 공간이 어떤 함의를 갖는지 묻도록 한다. 관객들은 작품을 전시한 공간의 장소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투명한 유리벽이 둘러싸인 전시공간은 임시 점유지에 가깝다. 사진을 비닐에 넣어 진열하는 방식은 기본적으로 조립식 행거와 같이 임시방편의 성격을 부여한 사진 보호 차원의 장치이지만, 동시에 작품과 관객의 스킨십을 열어놓는다. 여기서 사진은 개별 작품인 동시에 사진과 사진이 밀착하고 관객의 몸과 부대끼는 일종의 몸으로 해석을 확장한다. 비닐 포장지는 작품을 보호하고 진열하기 위한 용도 외에도 콘돔과 세이프 섹스를 어렵지 않게 연상케 한다. 사진과 관객의 몸이 접촉하는 것은 비닐 포장지가 있기에 가능한 것이기도 한 셈인데, 이는 과거 HIV/AIDS위기에 콘돔을 섹시하게 부각한 캠페인의 언어를 환기한다. 동성애적 맥락으로 접근 가능한 독해는 앞서 배치의 유사성을 들어 언급한 다른 작가들의 작업들로부터 차별성을 갖도록 한다. 유리벽과 비닐 포장지는 속을 그대로 노출하지만 동시에 빛을 반사하여 시야를 방해하는데, 이는 유리벽장이 갖는 은유의 연장으로도 읽음 직 하다. 촘촘하게 작품이 진열된 전시장 안을 관객들이 지나다닌다. 가설된 진열대에 반복적으로 배열된 사진들로부터 간신히 동선을 확보하지만 결국 작품과 부딪히고 피하며 스킨십이 이뤄지는 상황은 게이 클럽 내지 게토의 분위기와 강력하게 연결된다.

투명한 벽과 옷장 안에 가득 매달린 사진 작업은 하나의 설치이자 가설 건축이기도 하다. 전시는 전시장 너머 퀴어 장소성을 둘러싼 해석의 폭을 넓힌다. 투명하지만 반폐쇄적인 공간, 투명하게 닫힌 전시공간은 수십년 동안 주변 음향기기를 파는 상가의 풍경에 부조화를 이루며 다른 풍경을 만든다. 과하게 화장한 남자 인형들의 모습에 상인들은 불편을 표현할 정도로 전시는 내부공간을 보호하지만, 동시에 외부 시선을 유혹한다. 좁은 공간 겹겹이 매달리고 배열된 사진들은 과거 전시공간 근처 을지로와 신당의 오랜 게토로부터 지금의 종로까지 게이 하위문화의 골목에 오버랩 한다. 더불어 전시의 일시적 이벤트는 익선동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제 장소에 이름을 붙이지 못하고 사장될 위기에 처한 게이들의 공간에 가 닿는다. 사방에 투과되지만 고립된 공간 속에서 이뤄지는 전시는 개발이 번복되고 도시 재생과 복원으로 거듭되는 장소에 거듭 시민의 이름을 박탈당하고 배제되는 상황 위에 한시적으로 장소를 점하는 최근의 시도들을 환유한다. 임시적으로 들어왔지만 결국 재생의 일환으로 또는 개발의 명목으로 젠트리피케이션에 가담하고, 의미의 관성 속에 밀려나지만 그럼에도 이름을 남기기 위한 쾌락적인 노출은 이 도시에 어떤 자국을 남길 것인가.

3.

그의 사진술은 기억을 물신화하는 텅 빈 사물을 그대로 담기보다 기억의 부재를 상기하는 효과를 필사적으로 드러냈다. 기록하고 수집하고 배열하는 강박적 수행의 무게는 다시 셔터를 눌러 평면으로 차원변경하는 건조하고 쿨한 작업이 되기도 한다.

<유리 벽장> 은 기억과 기억 불가능성의 기록으로서 사진술을 바탕으로 작가가 자신의 욕망을 드러낸다. 이번 전시를 통해 작가는 실패한 기억의 빈자리로서 사진에 쾌락의 징후를 비춘다. 나아가 사진을 바탕으로 유리 벽장의 공간을 만들고 이를 서울 게이 커뮤니티의 물리적 장소성에 비평적으로 교감한다. 기억과 쾌락의 불안정성을 평면의 작업으로 남기는 작업은 도시 공간 하위 주체의 장소 해석으로 확장한다. 불안정하고 취약한 상황 속에 작가가 포착하는 것은 포착 불가능한 기억도, 또는 기억의 향수도 아니다. 오히려 그가 포착하는 것은 장소를 불안정한 쾌락의 얼굴, 또는 불안정하기에 보다 섹시할 수 있는 유리 벽장의 감각이다.

장소와 이격된 채 나란히 배치된 풍경, 기억과 별개의 소재들을 배치하는 방식은 공간을 일시적으로 점유한다. 그 속에서 낯선 풍경은 이국성과 유흥으로 다시 쓰일 것이며, 다시금 기존의 질서에 의해 밀려날 수 있다. 이름을 부여 받지 못했던 쾌락이나 뒤늦게 의미부여 된 기억은 매혹적인 소재로, 타자로 호명되고 착취된다. 쾌락은 탈성애화되고, 자본의 관성이 취할 수 있는 모습으로 길들여진다.

하지만 화면을 점하고 장소를 점유하는 에너지들은 한 화면과 장소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개발과 성적 보수주의 정책에 의해 강제로 밀려나고 망각된다 해도 화면 가득 채운 장난감들은 화면에서 화면을 옮겨 다니고, 쾌락의 기표들은 인화지에 넘쳐날 것이다. 욕망을 투여한 사진 작업으로부터 게토의 공간을 끌어내고 이를 바깥으로 확장 하듯, 착취되고 밀려나고 길들여지길 강요당하는 중에도 이미지들은 어떤 아우성을 치고 있다. 이는 포착에 실패한 개인의 기억으로부터 집단의 쾌락으로, 공동체의 장소성으로 이어지는 궤적을 그린다.

그런 점에 그의 전시 <유리 벽장>은 멈추지 않고 비빌 자리를 확보해가며 불안정한 쾌락을 지속적으로 남기는 작업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기억 불가능성의 표상을 차분히 담아낸 이전의 사진술로부터 합성과 교란을 통한 쾌락으로 이동했다면, 사진의 두 극이 한 장소에 교차하고 포개어지는 모습은 보다 다양한 이미지의 층들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실패한 기억과 애도가 쾌락에 포개진 모습은 어떤 얼굴을 하게 될 것인가.


[1]수잔 스튜어드, 『갈망에 대하여』, 박경선 옮김 (산처럼, 2015), p.216.

[2]발터 벤야민,「사진의 작은 역사」,『발터벤야민 선집2』, 최성만 옮김 (도서출판 길, 2007), p.185. 의 내용을 일부 수정.

[3]단적으로 종로 익선동은 낙원동은 서울시 주도의 도시재생사업지역으로 꼽힌다. 하지만 창덕궁 앞부터 종로3가 일대를 아우르는 서울시의 역사인문재생계획을 보면 귀금속, 국악, 익선동 한옥마을 등을 기존 종로3가 구성 요소로 고려하면서 게이 커뮤니티에 대해선 언급이 없다. ‘핫플레이스’ 된 익선동 일대 가게들이 고민하는 이유, <한겨레>, 2017. 8. 16. 등록. 링크: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07071.html. 한편익선동일대에음식점들을운영중인글로우서울은종로3가에성소수자의역사와현재를기억하기위한취지에서 5월 26일 익선동 일대에  ‘익선동 야간개장’을 진행했다. 행사 취지의 글은 다음의 링크를 참조: https://www.facebook.com/GLOWSEOUL/photos/a.707237252742707.1073741828.706906612775771/1295408630592230/?type=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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